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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준규의 ESG 모델링 9] 지속가능한 고객관리 上 레고의 ‘투명한 동행’

  • 작성자 사진: Jace Shim
    Jace Shim
  • 11월 4일
  • 3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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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갖고 놀던 블록과 손자가 오늘 가지고 노는 블록이 완벽하게 맞물린다는 건 단순히 제조 정밀도 문제가 아니다.


3대가 한 공간에서 같은 장난감으로 함께 놀 수 있다는 것. 덴마크어로 ‘재미있게 놀다’를 뜻하는 ‘Leg Godt’에서 유래한 레고가 만들어온 독특한 가치다. 레고는 단순히 장난감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세대를 연결하는 경험을 파는 회사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객 관계를 논할 때 레고만큼 흥미로운 사례를 찾기 어렵다.


블록이 현재 형태로 특허를 받은 이후 레고는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해왔다. 과거에 만들어진 블록과 지금 만들어지는 블록이 완벽하게 호환돼야 한다. 10㎛ 오차범위 내에서 제작되는 정밀도 덕분에 아버지가 물려준 1980년대 블록과 아들이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무 문제 없이 결합된다.


기업이 약속한 품질 지키기만으로 고객 관계가 만들어지진 않지만, 레고에게 품질에 대한 신뢰는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장점이 레고 앞에 새로운 딜레마를 던졌다. 매년 약 10만t에 육박하는 ABS 플라스틱으로 블록을 만들어온 레고는 지속가능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과 마주했다. 환경을 생각하는 부모들은 점점 플라스틱 장난감을 멀리했다. 무엇보다 레고의 핵심 고객인 어린이들이 직접 회사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을 줄여달라는, 환경을 고려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레고가 무시할 수 없는 신호였다.


많은 기업이 이런 상황에서 완성된 해결책을 발표하며 위기관리에 나선다. 레고가 선택한 길은 달랐다. 문제 해결 과정 자체를 고객과 나누기로 했다. 모니터링에 참여할 가정에 새로운 소재로 만든 시제품 블록을 보냈다. 사탕수수 기반 플라스틱으로 만든 나무 조각과 나뭇잎 블록이 첫 시도였다.


아이들은 새 블록을 만지고 기존 블록과 결합해보며 색감과 촉감을 비교하며 세밀한 피드백을 보냈다. 이러한 피드백 방식으로 재활용 페트병, 식물성 원료로 만든 소재,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에서 추출한 연료로 만든 플라스틱까지 가능한 모든 대안을 탐색했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건 친환경 정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레고는 실패를 숨기지 않았다.


재활용 페트병으로 블록을 만드는 프로토타입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지 2년 만에 레고는 프로젝트 중단을 선언했다. 재활용 페트병을 건조하고 강화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새로운 설비와 에너지가 오히려 탄소 배출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보통 기업이라면 이런 실패를 숨겼을 상황에서 레고는 공식 웹사이트에 지속가능성 진행 상황 페이지를 만들어 현재 진행 중인 도전과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그대로 공개했다.


놀랍게도 이런 정직함은 고객 신뢰를 오히려 높였다. 수백 가지 재료를 테스트했지만 지속가능성 문제를 완벽히 해결할 마법 같은 재료는 찾을 수 없었다는 솔직한 고백 이후, 고객들은 오히려 레고의 편에 섰다. 레고가 그린워싱이 아닌 진짜 해결책을 찾고 있다는 확신을 줬기 때문이다. 완벽함보다 정직함을 선택한 레고의 태도가 신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고객 참여는 ‘빌드 더 체인지(Build the Change)’ 프로그램을 통해 한 단계 더 진화했다.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레고 블록으로 표현해보도록 초대했다. 떠다니는 농장, 쓰레기를 먹는 로봇, 태양광 패널이 달린 친환경 건물까지 아이들의 상상력은 무한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레고가 단순히 아이디어를 모으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 버지니아에 새로 짓는 탄소중립 공장 설계 과정에서 레고는 지역 어린이 250명을 실제로 초대했다.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정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곤충과 동물이 살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직원이 쉴 수 있는 놀이터는 어떻게 구성되면 좋을지에 대한 어린이 제안이 실제 설계에 반영됐다.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는 어린이 6000명 목소리를 담은 책자가 세계 정상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이런 접근이 가능했던 건 레고가 오랫동안 쌓아온 고객과 관계 방식 덕분이다. 성인 레고 팬들을 가리키는 AFOL(Adult Fan of Lego)은 단순한 동호회가 아니라 제품 개발 과정에 참여하는 파트너였다. 레고는 일정 기준 이상 활동을 보이는 전 세계 사용자 그룹을 공식 인정하고 지원하며 때로는 팬들이 제안한 디자인이 실제 제품으로 출시하기도 했다. 지속가능성 프로젝트에서 어린이들을 참여시킨 것도 같은 철학의 연장선이었다.


현재 레고 제품 중 약 30%가 지속가능한 소재로 전환됐다. 목표 달성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레고가 이미 성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 세계 수백만 가정이 레고의 지속가능성 여정을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이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지만 정직한 여정을 공유했다. 고객은 레고가 쉬운 길 대신 올바른 길을 선택했음을 인지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ESG 시대의 새로운 고객관계가 만들어졌다.


레고가 보여준 고객관계 본질은 ‘투명한 동행’이다. 완성된 결과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고민 과정을 나누고, 실패까지 투명하게 공유하며, 고객 목소리를 진지하게 경청해 실제 의사결정에 반영했다.


레고는 고객을 마케팅 대상이 아닌 가치 공동 창조 파트너로 대했다. 그 결과 브랜드는 단순한 제품 제공자를 넘어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고객과 일대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깊이 있는 참여, 개발 과정에 직접 관여하며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협력적 관계가 레고식 지속가능성의 핵심이었다.


3대가 함께 놀 수 있는 블록을 만들어온 회사답게, 레고는 지금 세 세대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끝내 성공할지 아무도 모르지만, 전 세계 어린이와 부모가 레고의 도전을 지켜보고 응원하며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심준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더솔루션컴퍼니비 심준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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