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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준규의 ESG 모델링 23] 데이터 가시성과 신뢰의 경제학 上 볼보가 ‘배터리 여권’으로 설계한 데이터 자산 모델

  • 2월 9일
  • 3분 분량

[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유럽 시장에 진출한 국내 배터리·완성차 업계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DPP) 대응이다.



DPP는 제품 원재료 채굴부터 생산, 재활용에 이르는 전 과정의 데이터를 디지털로 기록하고 공개해야 하는 규제다. 많은 기업에 비싼 통행료처럼 인식된다.



경영학적 관점에서 보면 데이터 가시성(Data Visibility) 확보는 단순한 규제 대응 비용이 아니다. 제품의 신뢰 자산을 구축하는 전략적 기회다.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데이터를 고객에게 더 나은 제품 경험을 제공하는 핵심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스웨덴 완성차 제조업체 볼보 자동차가 그 선두에 서 있다. 자사의 플래그십 전기 SUV인 EX90에 세계 첫 배터리 여권을 도입했다. 배터리 여권이란 배터리 출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정보를 디지털로 기록하는 시스템이다.



마치 사람의 의료 기록처럼, 배터리가 어디서 만들어졌고 어떤 원자재로 구성됐으며 얼마나 사용됐는지 모든 이력을 추적한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코발트, 리튬 등 핵심 원자재가 어느 광산에서 채굴됐는지부터 기록한다. 제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 재활용 소재 포함 비율도 투명하게 공개된다.



볼보가 배터리 여권을 도입한 표면적 이유는 2027년 시행될 유럽연합(EU)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전략적 목표가 숨어 있다. 전기차 비즈니스의 고질적 약점인 잔존 가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다.



전기차 중고 시장에서 구매자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배터리 상태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엔진 소리를 듣고 시동을 걸어보면 대략적인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배터리는 겉으로 봐서는 상태를 전혀 알 수 없다.



충전이 잘 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 주행 거리는 신차 대비 절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 이전 소유자가 급속 충전을 자주 했는지, 고온에 장시간 노출됐는지, 사고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구매자는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가격을 낮춰 부른다.



판매자는 제대로 관리한 차량인데도 헐값에 팔 수밖에 없다. 정보의 비대칭이 심화되면서 중고 전기차 가격은 내연기관차보다 빠르게 떨어진다. 신차 구매자도 전기차 구매를 주저하게 된다.



배터리 여권은 배터리의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악순환을 끊어낸다. 배터리가 몇 번 충전됐는지, 급속 충전 사용 빈도는 어느 정도인지, 최대 용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두 기록된다. 사고 이력, 침수 여부, 과열 경험까지 숨김없이 드러난다.



구매자는 정확한 배터리 상태를 알고 합리적인 가격을 지불할 의향이 생긴다. 배터리가 잘 관리됐고 용량이 충분히 남아 있다면 그만큼 높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한다. 판매자도 제대로 관리한 차량에 대해 정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중고차 가격이 방어되면 신차 구매 결정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3년 뒤 중고차로 팔 때 가격이 덜 떨어진다는 확신이 있으면, 소비자는 신차 구입 시 더 높은 가격을 받아들인다. 잔존 가치 보전이 신차 판매 전략의 핵심 무기가 되는 구조다.



이 배터리 여권은 제품 수명이 다한 뒤에도 위력을 발휘한다. 전기차 배터리는 자동차로서 역할을 마쳐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 용량이 어느 정도 떨어진 배터리는 가정용 에너지 저장 장치(Energy Storage System, ESS)로 재사용할 수 있다.



완전히 수명을 다하면 내부 소재를 추출해 새 배터리 제조에 투입한다. 문제는 폐배터리가 재활용 시설에 도착했을 때 내부 구성을 정확히 모른다는 점이다. 분해하고 분석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든다.



반면에 배터리 여권이 있으면 폐배터리가 회수 시설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최적 처리 경로가 결정된다. 코발트가 많이 포함된 배터리인지, 리튬 비중이 높은 배터리인지 미리 알고 있으면 해당 소재 회수 라인으로 바로 투입된다. 처리 시간은 단축되고 회수율은 높아진다.



희귀금속 시장의 극심한 변동성을 고려하면 재활용 소재 확보는 원가 안정성을 높이는 핵심 전략이다. 2020년부터 2023년 사이 리튬 가격은 5배까지 치솟았다가 급락했다. 신규 채굴 원자재에만 의존하면 가격 변동 리스크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재활용 소재 비중을 높이면 가격 변동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 분쟁 광물이나 아동 노동 같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리스크도 줄어든다. 유럽연합은 2030년까지 배터리 제조 시 재활용 소재 사용을 의무화하고 그 비율을 단계적으로 높인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은 북미산 원료 사용 비율을 요구한다. 규제를 충족하지 못하면 보조금을 받을 수 없고 시장 진입 자체가 막힌다. 재활용 소재 확보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데이터 기반 순환 체계를 갖추지 못하면 원가 경쟁력과 공급 안정성을 모두 잃게 된다.



결국 볼보 배터리 여권은 보고서가 아니라 수익 보전 장치라 할 수 있다. 규제가 요구하는 투명성을 제품 신뢰도를 높이는 도구로 활용했다. 중고차 시장의 가격 방어, 재활용 비용 절감, 공급망 리스크 관리가 하나의 데이터 시스템으로 연결된다.



국내 관련 기업이 준비해야 할 방향도 이 사례를 통해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유럽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배터리·완성차 기업이라면 디지털 제품 여권 대응을 단순 규제 충족이 아니라 제품 신뢰도 강화 기회로 접근해야 한다. 원자재 추적 시스템을 구축하되, 중고 시장 가격 방어와 재활용 효율성 향상까지 연결하는 통합 설계가 필요하다.



데이터 구축을 구매 및 조달 부서만의 업무로 한정하면 안 된다. 경영진은 제품의 생애주기 수익을 극대화할 전략적 자산으로 재정의해야 하고, 마케팅 부서는 데이터 투명성을 브랜드 신뢰도로 전환하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생산 부서는 재활용 소재 비중을 높이는 공정 개선에 나서야 하며, 각 부서의 역할이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돼야 실질적 성과가 나온다.



폐기물을 고부가가치 자산으로 전환하려면 소재의 이력과 순도를 추적하는 시스템이 필수다. 볼보 사례가 보여주는 핵심은 데이터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수익 창출의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데이터를 장악하는 기업이 미래 모빌리티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다.



|심준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녹색금융으로 읽는 ESG 이야기>,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더솔루션컴퍼니비 심준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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