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준규의 ESG 모델링 25] 에너지 유연성의 수익화上 발전소 없는 전력 공급자의 플랫폼 전략
-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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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탄소중립 시대의 핵심 과제는 화석연료 발전소를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것이지만, 그 길목에는 고질적인 난제가 숨어 있다. 바로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태양광과 풍력은 날씨에 따라 전력 생산량이 들쭉날쭉한데, 전력은 생산과 동시에 소비되지 않으면 버려지거나 대규모 정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변동성을 잡기 위해 기존 전력 회사들은 막대한 자본을 들여 대규모 예비 발전소나 배터리 시설을 구축해야만 한다.
그 결과는 엄청난 매몰 비용과 에너지 단가 상승이라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재생에너지를 늘려야 한다는 공감대는 넓지만 경제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잡는 방법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전력망 관리는 어느새 기술 문제를 넘어 비즈니스 모델 설계의 문제로 변했다.
독일의 넥스트 크라프트베르케(Next Kraftwerke)는 이 난제에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단 하나의 발전소도 직접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유럽 최대 전력 공급자 중 하나로 올라섰는데 그 비결은 가상 발전소(Virtual Power Plant, VPP)라는 개념을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으로 삼은 데 있다. 전국에 흩어진 수만 개의 태양광 패널, 풍력 터빈, 축사의 분뇨를 활용한 바이오가스 발전기를 디지털 네트워크로 하나로 묶어냈다.
개별 발전기는 작고 분산되어 있지만 플랫폼이 통합하면 거대 발전소와 동등한 출력을 낼 수 있어 마치 하나의 원자력 발전소처럼 작동한다. 물리적 자산이 아닌 디지털 거버넌스가 수익을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에셋 라이트(Asset-light) 모델이다.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은 데이터를 통한 중앙 통제와 인센티브 정렬에 있다.
각 소규모 발전소에 자체 개발한 원격 제어 장치를 설치하고 AI 알고리즘으로 실시간 전력 시장 가격을 분석해 전기가 모자라 가격이 치솟을 때는 발전기에 가동 명령을 내려 전기를 팔고 반대로 공급이 넘칠 때는 가동을 멈추거나 에너지를 저장하게 한다.
개별 소상공인 발전 사업자는 시장의 흐름을 읽기도 어렵고 협상력도 없지만 플랫폼에 참여하는 순간 대형 전력 회사와 대등한 가격에 전기를 팔아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된다.
중개 과정에서 플랫폼은 수수료를 챙기고 전력망 안정성을 유지해 준 대가로 정부 보조금도 받는 구조다. 소규모 사업자와 플랫폼 양쪽 모두 이익을 얻는 인센티브가 깔끔하게 정렬된 설계다.
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집합 행동 문제(Collective Action Problem)를 플랫폼이 풀어낸 사례이기도 하다. 개별 발전 사업자는 전력 시장에 직접 참여할 규모도 정보도 없지만 플랫폼이 이들을 묶어 거래 비용을 낮추고 협상력을 높여준다. 참여하는 발전기가 많아질수록 플랫폼의 출력 안정성이 높아지고 시장 지배력도 커지는 양면시장 이론의 네트워크 효과가 그대로 작동하는 셈이다.
거래비용이론 시각으로 보면, 소유보다 조정이 더 효율적인 산업 구조로 전환한 것이기도 하다. 자산을 소유하지 않으니 감가상각 부담도 없고 기술 변화에 따른 좌초 자산 리스크도 피해갈 수 있으며 소규모 발전 사업자는 자산을 유지하면서 플랫폼을 통해 시장 접근성을 얻게 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관점에서도 이 모델은 의미가 남다르다. 환경 측면에서는 재생에너지의 치명적 약점인 변동성을 해결함으로써 화석연료 기반 보조 발전소를 추가로 지을 필요를 없앤다. 지배구조 측면에서는 소수 대자본이 독점하던 에너지 시장을 수만 명의 소규모 사업자가 참여하는 민주적 생태계로 재편한다. 단순히 착한 에너지를 쓰자는 구호에 머물지 않고 시스템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잡았다.
독일은 재생에너지 비율이 높아지면서 전력망 불안정 문제에 일찍 부딪혔다. 2023년 기준 독일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약 50%에 달하는데 낮에는 태양광 발전으로 전기가 넘쳐 전기료가 마이너스로 떨어지기도 하고 밤에는 반대로 급등하는 일이 반복됐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려면 천문학적 비용의 대규모 배터리 시설을 지어야 하지만 가상 발전소는 이미 존재하는 분산 자원을 활용해 그 문제를 풀어냈다.
넥스트 크라프트베르케는 2009년 설립 이후 현재 약 1만5000개 이상의 분산 발전 자원을 통합 관리하고 있으며, 총 출력 규모는 약 10GW로 대형 원자력 발전소 10기 분량에 해당한다. 독일을 넘어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프랑스, 폴란드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 2021년 일본의 미쓰비시 파워에 인수됐지만 독립적인 브랜드와 운영 체제를 유지하며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플랫폼에 참여하는 발전 사업자도 농가, 중소기업, 지방자치단체, 산업 시설까지 다양한데, 각자 보유한 태양광·풍력·바이오가스·배터리 등을 연결해 실시간으로 전력 시장에 참여한다. 개별 발전기 하나하나는 작지만 플랫폼이 묶어내면 거대한 출력으로 탈바꿈한다.
한국도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2024년 6월 시행되며 에너지 시장의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법안은 재생에너지 중심의 분산형 전력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며 가상 발전소 사업자를 공식 인정하고 전력 거래 시장 참여를 허용한다. 제도적 기반은 갖춰졌지만 실제로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하고 운영할 역량을 갖춘 기업은 아직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국내 기업은 단순히 공장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다는 자기 소비형 ESG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넥스트 크라프트베르케처럼 흩어진 자원을 연결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플랫폼 사업자로의 전환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특히 데이터 분석 역량을 갖춘 IT 기업이나 대규모 고객 접점을 가진 제조사라면 자사 기기들을 하나의 유연성 자원으로 묶는 비즈니스 모델을 선제적으로 그려볼 필요가 있다.
전기차 배터리, 산업 시설의 예비 전력, 건물의 냉난방 시스템까지 모두 전력 시장에서 유연성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주차 중인 전기차 배터리는 전력망에 전기를 공급하거나 저장 장치로 기능할 수 있고 산업 시설의 예비 전력은 수요 반응(Demand Response) 프로그램에 참여해 수익을 낼 수 있다. 건물의 냉난방 시스템도 전력 가격이 높을 때 가동을 줄이고 낮을 때 미리 냉난방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면서 동시에 전력망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다.
에너지 전환은 기술 문제이기 이전에 흩어진 가치를 어떻게 조직하고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경영 설계의 문제다. 독점적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데이터 기반의 연결 힘을 심는 것, 그것이 한국 기업이 넥스트 크라프트베르케에서 배워야 할 진정한 ESG 혁신의 본질이다. 가상 발전소는 물리적 자산 없이도 시장을 지배할 수 있음을 이미 증명했고 이제는 국내 기업도 조정과 연결의 가치를 직접 설계할 때가 됐다.
|심준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녹색금융으로 읽는 ESG 이야기>,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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