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준규의 ESG 모델링 18] 공급망과 파트너십 下 막스앤스페서가 투명성으로 이끌어낸 협력사의 자발적 참여
- Jace Shim
- 1월 5일
- 3분 분량

[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국내 기업 대부분은 1차 협력사 중심 관리에 머물러 있다. 직접 계약한 협력사의 환경·안전 수준은 점검하지만, 그 협력사가 거래하는 하청업체까지는 파악하지 못한다. 원자재 채굴, 부품 가공, 화학물질 처리 같은 고위험 공정은 대부분 공급망 하단에 위치하는데, 정작 관리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가시성 확보가 어려운 건 기술적 문제만이 아니다. 자신의 공급망 구조를 본사에 공개하면 본사가 직접 거래로 전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고, 하청업체 문제가 드러나면 자신의 평가가 나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작용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인센티브 정렬(Incentive Alignment)이 핵심인데, 협력사 입장에서 데이터 제공이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영국 유통기업 막스앤스펜서(Marks & Spencer, 이하 M&S)가 2007년부터 추진한 ‘플랜 A’ 전략은 인센티브 정렬과 투명성을 통해 협력사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낸 사례로 주목받는다.
M&S는 공급망 데이터를 협력사와 공유하고 개선 성과에 따라 거래 조건을 차등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여타 대부분 기업이 협력사에게 일방적으로 기준을 요구하고 점검하는 방식과 대비된다.
핵심은 M&S가 단순히 데이터를 수집한 게 아니라, 그 데이터를 협력사와 공유하며 개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다. 협력사별 코드 준수율, 개선 이행률, 추적 범위 같은 지표를 공개함으로써 협력사 스스로 벤치마킹하고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의류 공급망에서 협력 공장의 노동 환경 점수를 공개하고, 점수가 낮은 공장은 개선 계획을 제출하게 했다.
동시에 개선 지원도 제공했고, 점수가 높은 공장은 우선 거래처로 인정받았으며 신규 주문 기회도 늘어났다. 환경·사회 성과를 개선하면 거래 물량이 늘고, 장기 계약 가능성이 높아지는 반면, 개선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려난다는 신호가 분명했다. 투명성이 곧 동기 부여가 된 구조인데, 협력사들은 자신의 점수가 공개되면서 다른 협력사와 비교할 수 있게 됐고, 개선 노력이 거래 조건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협력사와 소통 구조도 근본적으로 재설계됐다. 연 1회 감사 보고서를 받는 대신, 분기별로 개선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함께 목표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일방적 평가가 아니라 협력적 개선의 틀을 만든 것인데, 분기별 리뷰에서는 단순히 점수를 매기는 대신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함께 논의했다.
예를 들어 폐수 처리 시설 투자에 어려움을 겪는 공장에는 기술 파트너를 연결해줬고, 안전 교육이 필요한 곳에는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문제를 지적하는 관계에서 함께 해결하는 관계로 전환한 결과, 공급망 리스크가 감소하면서 갑작스러운 공급 중단이나 평판 손실을 줄여나갔다. 감사와 점검에 드는 관리 비용도 절감됐는데, 협력사의 자발적 개선이 늘면서 일일이 감시할 필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브랜드 신뢰도도 강화됐다. 투명성을 기반으로 한 공급망 관리가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았고, 공급망 데이터를 연례 보고서에 공개하면서 지속가능성 성과를 구체적 수치로 입증했다. 브랜드 가치 상승으로 이어진 셈이다.
M&S 사례가 주는 교훈은 투명성과 인센티브 정렬이 단순한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효율적 운영 전략이라는 점이다. 협력사가 데이터를 숨기려는 건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데이터 제공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투명성을 높인 협력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구조를 만들면, 협력사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데이터를 공개하고 개선 성과를 입증하려 한다.
ESG 공급망 관리에서 협력사와 파트너십을 선언하는 기업은 많지만, 실제로 작동시키는 기업은 드물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해도 구체적인 운영 체계가 없으면 형식에 그치기 쉽다. 월마트가 WWF와 함께 농업 공급망의 기준을 설계했듯이, 파트너십은 구조와 설계 문제였다.
실제로 국내 기업이 직면한 현실을 보자. 협력사가 환경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자주 듣는다. 요청해도 응답이 없거나, 형식적인 수치만 받거나, 신뢰성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불만이 반복된다.
글로벌 기업은 같은 문제를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협력사가 데이터를 제공할 동기를 설계했기 때문인데, 단순히 요구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는 협력사 협조를 이끌어낼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데이터를 제공하면 거래 지속성이 높아지고, 개선 성과가 인정받으며,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강화된다는 신호를 분명히 줘야 협력사가 움직인다.
공급망 가시성(Supply Chain Visibility)이라는 개념이 최근 경영학에서 주목받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가시성이란 공급망 전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1차 협력사뿐 아니라 2차, 3차 협력사까지 추적할 수 있어야 진정한 리스크 관리가 가능하다.
월마트와 M&S의 사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본질을 보여준다. 월마트는 WWF와 파트너십을 통해 농업 공급망의 기준을 함께 설계하고, 농가에 교육과 기술 지원을 제공하며 구조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M&S는 투명성과 인센티브 정렬을 통해 협력사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데이터 기반 개선 시스템을 구축했다.
두 기업 모두 협력사를 관리 대상이 아닌 가치 창출 파트너로 재정의했다. 월마트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파트너십을 통합했고, M&S는 운영 과정에서 투명성을 통해 파트너십을 강화했다. 접근 방식은 달랐지만, 협력사에게 투자할 명분과 지속성을 보장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국내 기업이 준비해야 할 과제는 분명하다. 협력사와 데이터를 공유하고, 목표를 함께 설정하며, 성과를 투명하게 추적하는 운영 체계가 갖춰져야 진정한 경쟁력이 생긴다. 파트너십은 선언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월마트와 M&S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구조를 증명했고, 국내 기업도 이제 협력사를 성과 창출 파트너로 전환할 때다.
|심준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녹색금융으로 읽는 ESG 이야기>,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더솔루션컴퍼니비 심준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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