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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준규의 ESG 모델링 32] 가치 관리 노동으로下 피버(Fiverr), 전문성을 상품화 한 노동 재설계

  • 3일 전
  • 3분 분량

[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한 달에 얼마를 버느냐는 질문에 대부분 직장인은 월급을 떠올린다. 매달 정해진 날, 정해진 금액이 통장에 들어온다. 그 구조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실 그 안에는 아주 오래된 전제가 숨어 있다. 내 시간을 회사에 팔고, 회사는 그 시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계약이다.



시간을 파는 구조에서는 내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보다 얼마나 오래 자리에 있었는지가 먼저 계산된다. 1시간 일한 초보와 1시간 일한 전문가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게 ‘고용’이라는 시스템의 기본 논리다. 경력이 쌓이고 실력이 늘어도 급여 체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피버(Fiverr)는 바로 이 구조를 파괴적 혁신으로 도전한 기업이다. 2010년 이스라엘에서 설립된 피버는 프리랜서와 기업을 연결하는 디지털 서비스 마켓플레이스다. 처음엔 5달러 짜리 소규모 작업을 거래하는 플랫폼으로 시작했다. 이름 자체가 ‘5달러(Five)’에서 나왔다. 그런데 지금 피버의 상위 프리랜서는 프로젝트 하나에 수천, 수만 달러를 받는다. 가격이 올라간 게 아니라 거래 본질이 바뀌었다.



‘긱(Gig)’ 모델을 도입했다. 긱은 원래 재즈 뮤지션이 필요에 의해 임시로 섭외해 공연하던 방식을 의미한다. 피버는 이 개념을 빌려 프리랜서가 자신의 서비스를 ‘공연 한 편’처럼 패키지로 묶어 파는 방식을 만들었다. 로고 디자인, 영상 편집, 카피라이팅, 코드 개발 같은 서비스를 시간 단위가 아니라 결과물 단위로 정의하고 가격을 매긴다. 구매자는 ‘10시간짜리 작업’이 아니라 ‘완성된 로고 3종’을 산다.



전통적인 프리랜서 시장과 비교하면 차이가 분명해진다. 기존 방식은 클라이언트가 프로젝트를 올리면 프리랜서가 제안서를 넣고 경쟁하는 구조였다. 다양한 평가 기준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낮은 가격을 써낸 사람이 유리했다. 협상 과정에서 시간이 소모됐고 일이 어느 선에서 끝나는지도 불분명했다.



피버의 긱 모델은 반대로 작동한다. 프리랜서가 먼저 서비스를 정의하고, 가격을 책정하며, 범위를 명확히 한다. 구매자는 이미 정해진 서비스를 고르고 결제한다. 협상이 아니라 선택이다.



이 구조가 노동 성격을 바꾼다. 시간을 파는 사람은 일하는 동안만 수익이 생긴다. 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에는 수익이 멈춘다. 반면 피버에 등록된 긱은 프리랜서가 잠든 사이에도 노출되고, 검색되고, 구매된다. 서울 프리랜서가 만들어놓은 긱을 뉴욕 스타트업이 새벽에 발견하고 주문한다. 전문성이 한 번 패키지로 정의되면, 그 자체가 수익을 만드는 자산으로 작동한다.



비즈니스 성과를 보면 시장의 니즈를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피버의 연간 총거래액(GMV, Gross Merchandise Value)은 약 12억 달러(1조6500억원)를 기록했다. 활성 구매자 수는 약 380만명이고, 구매자 1인당 평균 지출은 296달러(41만원)로 전년 대비 9% 증가했다.



눈에 띄는 부분은 구매자 수가 줄어드는 동시에 1인당 지출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작고 저렴한 작업보다 복잡하고 고가 프로젝트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신호다. 플랫폼이 ‘5달러 심부름’에서 ‘전문 서비스 마켓’으로 진화하고 있다.



플랫폼 내 신뢰 구조도 이 전환을 뒷받침한다. 구매자는 긱마다 붙은 별점, 완료율, 납기 준수율, 포트폴리오를 보고 선택한다. 성과가 누적되면 레벨이 올라가고,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노출과 더 높은 신뢰를 얻는다. 상위 프리랜서로 인정받으면 ‘피버 프로(Fiverr Pro)’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는 별도 심사를 거친 전문가 등급으로 더 높은 단가와 기업 고객 접근권이 따라온다. 실력이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 평판이 자산이 되는 구조가 플랫폼 안에 내장돼 있다.



거버넌스 측면에서도 피버 설계는 주목할 만하다. 전통 고용 시장에서 프리랜서는 계약이 끝나면 흔적이 남지 않는다. 피버에서는 완료된 모든 거래가 평점과 리뷰로 쌓이고, 이 기록이 다음 거래의 신뢰 자산이 된다. 일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납기를 어기거나 품질이 낮으면 자연스럽게 걸러진다. 플랫폼이 강제하지 않아도 시장이 스스로 품질을 관리하는 구조다.



상편에서 룸(Loom)은 조직 내부의 시간 구조를 바꿨다. 실시간 회의라는 전제를 제거하고, 직원 각자가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조건에서 일하도록 설계했다. 피버는 개인이 노동 시장과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바꿨다. 고용이라는 계약 안에서 시간을 팔지 않고, 전문성을 패키지로 정의해서 결과물을 파는 구조로 전환했다.



두 모델이 공통으로 증명하는 것은 하나다. 노동의 단위를 ‘투입한 시간’에서 ‘만들어낸 가치’로 옮기는 순간, 일하는 사람에게도 조직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프리랜서를 고용 관계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처럼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피버가 보여주는 현실은 다르다. 전 세계 기업이 지금 이 순간에도 피버에서 전문가를 찾고 있고, 실력 있는 개인이 국경과 시간대를 넘어 자신의 전문성을 팔고 있다.



노동의 재정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정의하고, 그 가치를 시장에 제시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룸이 조직의 시간을 설계하는 방식을 바꿨다면, 피버는 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설계하는 방식을 바꿨다.



어떻게 일하게 하느냐, 무엇을 팔도록 하느냐. 이 두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결국 지속가능한 노동 형태를 결정한다.



|심준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녹색금융으로 읽는 ESG 이야기>,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더솔루션컴퍼니비 심준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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