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준규의 ESG 모델링35] 금융의 사다리를 다시 놓다上 어펌(Affirm)의 책임 있는 여신 설계
-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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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신용카드를 새로 만들거나 한도를 올리려 할 때,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을 마주하게 된다. 연체 이력, 금융 거래 기간, 현재 부채 규모 같은 과거 기록이 신용점수를 결정하고, 그 점수가 발급 여부와 한도를 가른다. 소득이 일정하지 않은 프리랜서나 사업 초기 단계의 자영업자는 실제 생활 형편과 무관하게 낮은 점수를 받는 경우가 생기고, 막상 필요한 순간에 금융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소상공인 대출 현장도 비슷한 구조다. 최근 정부가 유류지원금, 임차료 지원, 긴급 운영자금 대출 같은 정책을 내놓아도, 신용 이력이 부족하거나 담보가 마땅치 않으면 이 또한 활용하기 어렵다. 지원 제도는 있지만 접근하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기간 꾸준히 영업해 온 소상공인이라도 과거 금융 거래 이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상환 여력을 인정받기 쉽지 않다. 배달 플랫폼 매출, 카드 결제 내역, POS(판매시점 정보관리) 데이터처럼 실제 영업 현황을 보여주는 정보는 충분히 있지만, 전통적인 심사 체계에서 이 데이터가 적극적으로 반영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있다.
미국 핀테크 기업 어펌(Affirm)은 이 부분에서 출발했다. 어펌은 FICO 스코어(Fair Isaac Corporation이 개발한 미국의 개인 신용평점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 여신 모델을 개발했다. 과거 금융 거래 이력이 아니라 구매 시점의 실시간 데이터로 상환 능력을 판단하는 방식이다. 기존 금융 시스템이 포착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를 설계했다.
어펌의 서비스 방식은 국내에서도 익숙한 개념과 닿아 있다. 쿠팡, 네이버쇼핑 같은 온라인 커머스 플랫폼에서 결제할 때 마지막 단계에서 카드사 무이자 할부를 선택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텐데, 어펌의 BNPL(Buy Now Pay Later, 지금 구매 나중 분납) 방식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카드사 무이자 할부는 카드 한도 안에서 일괄 적용되지만, 어펌은 구매 품목, 결제 패턴, 거래 맥락 같은 수백 가지 변수를 인공지능이 분석해 이 사람이 지금 이 금액을 실제로 갚을 수 있는지를 먼저 계산하고, 그에 맞는 분납 조건을 즉시 제시한다. 한도가 남아 있다고 무조건 승인되는 구조가 아니라, 상환 가능성을 판단한 뒤 조건을 맞추는 구조다.
이 차이가 만들어내는 효과가 상당하다. 카드 무이자 할부는 한도 내에서라면 구매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만, 어펌은 상환 능력 분석 결과에 따라 분납 조건이 달라지기 때문에 소비자 스스로 지출 규모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충동적인 고액 구매보다 계획된 지출로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구조다. 국내에도 이런 방식이 자리 잡는다면 카드 돌려막기나 할부 누적으로 이어지는 과소비 패턴을 줄이는 데 실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구조적으로 더 주목할 부분은 할부에 따르는 이자 방식이다. 어펌은 복리 이자를 부과하지 않는다. 대출 시점에 총 상환 금액이 확정되고, 연체해도 추가 수수료나 벌칙 이자가 없다. 소비자는 처음부터 총비용을 알고 선택하게 되고, 연체료 폭탄 같은 악순환이 구조적으로 차단된다.
수익 구조도 이 원칙에 맞게 설계됐다. 주 수익원은 가맹 판매자에게 받는 수수료다. 판매자는 어펌을 도입해 구매 전환율과 평균 주문 금액이 올라가는 효과를 얻는다. 플랫폼이 돈을 벌려면 소비자가 실제로 상환해야 하고, 상환이 지속되려면 갚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대출이 이루어져야 한다. 과도한 대출을 줄이는 게 플랫폼에도 이익인 구조로, 금융기관과 차주의 이해관계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이 모델을 국내 소상공인 정책 지원에 대입하면 실질적인 시사점이 생긴다.
정부가 정책 대출을 설계할 때, 오늘 실제로 장사가 되고 있는 가게라면 과거 금융거래 기록이 얇아도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담보 대신 활동 기반의 현실적 상환 여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과거 신용등급 대신 카드 매출 데이터, 배달 플랫폼 거래 이력, POS 결제 내역처럼 지금 이 가게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이터를 심사에 활용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면 업종별 매출 흐름에 맞게 상환 일정을 탄력적으로 설계하기도 가능하다. 비수기에는 상환액을 줄이고 성수기에 집중 상환하는 구조, 매출 변화에 따라 유예가 적용되는 구조처럼 지금의 획일적 분할 상환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다. 기술적으로는 이미 가능한 수준이고, 남은 건 제도 설계의 의지다.
금융 당국도 대안 데이터를 활용한 신용평가 체계를 검토 중이다. 통신요금 납부 이력, 온라인 결제 패턴, 공과금 데이터를 신용 판단에 반영하는 방향으로, 과거 기록 중심의 평가 체계를 보완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방향은 맞지만, 데이터를 모으는 것과 그 데이터로 실제 상환 가능한 조건을 설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펌의 여신 설계는 심사 기준 변경뿐 아니라, 빌려주는 방식 자체를 재설계했다. 갚을 수 있는 사람에게 갚을 수 있는 조건으로 빌려주고, 그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구조가 금융 신뢰의 출발점이다. 국내 정책 금융이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지원 대상을 넓히기보다 지원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게 우선이다.
국내 정책 설계자에게 어펌의 모델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다. 지금 우리 지원 구조는 갚을 수 있는 조건을 함께 설계하고 있는가.
다양한 소상공인 지원 정책이 큰 성과 없이 반복되는 이유 중 하나는, 지원을 받아도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는 데 있다. 지원금이 일회성으로 소진되는 게 아니라, 실제 영업 데이터를 기반으로 상환 여력에 맞게 설계된 금융 구조가 뒷받침될 때 소상공인은 지원을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심준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녹색금융으로 읽는 ESG 이야기>,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더솔루션컴퍼니비 심준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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