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준규의 ESG 모델링 17] 공급망과 파트너십 上 월마트·WWF의 협업
- Jace Shim
- 1월 5일
- 3분 분량

[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기업 공급망 관리가 단순히 납기와 가격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지 오래다. 협력사 환경 리스크가 본사의 평판 리스크로 직결되고, 하청업체 노동 문제가 브랜드 가치를 흔드는 시대다.
그런데 많은 국내 기업은 여전히 협력사를 관리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글로벌 기업은 이미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협력사를 비용 절감 대상이 아닌 가치 공동 창출 파트너로 재정의하고, 장기적 관계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설계한다. 비즈니스 모델 관점에서 파트너십이 핵심 자산이 된 셈이다.
윤리적 선택을 넘어 공급망 안정성과 리스크 관리를 위한 전략적 판단에서 비롯됐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공공기관 ESG 가이드라인도 이런 변화를 반영한다. 가치사슬 전반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중대성 평가 대상으로 포함하라는 요구가 명시됐다.
직접 통제가 어려운 협력사까지 관리 범위로 확대한 셈인데, 공공기관에 이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는 건 민간기업 역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신호로 읽힌다. 규제 강화 이전에 선제적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하면, 시장 접근성과 경쟁력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공급망이 비즈니스 모델의 중심이 되는 건 규제 대응 차원을 넘어선다. SCOR(Supply Chain Operations Reference) 모델 관점에서 보면 공급망은 원가 구조, 리드타임, 품질과 직결되며, 곧 기업의 수익성과 시장 대응력을 좌우한다. 협력사에서 발생한 환경 사고나 노동 문제는 공급 중단으로 이어지고, 대체 공급선 확보 비용과 평판 손실이라는 이중 타격을 입힌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을 운영하는 기업일수록 협력사 리스크가 전체 사업 연속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한 곳의 공급 중단이 전체 생산 라인을 멈출 수 있고, 한 협력사의 환경 위반이 수출 시장에서 퇴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급망 관리는 더 이상 조달 부서만의 업무가 아니라 경영진이 다뤄야 할 전략적 의사결정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협력사는 왜 환경 개선에 투자하지 않을까? 경제학의 거래비용이론(Transaction Cost Economics)으로 접근하면 답이 보인다. 협력사가 친환경 설비에 투자하거나 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특정 거래 상대를 위한 전용 투자(specific investment)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한 중소 협력사가 본사 요청에 따라 폐수 처리 시설에 5억원을 투자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다음 해 입찰에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계약을 잃는다면, 그 5억원은 회수할 방법이 없다. 거래비용이론은 바로 계약의 불확실성과 투자 회수 리스크를 다룬다.
단기 거래 구조에서는 협력사가 전용 투자를 할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논리다. 국내 기업이 가격과 납기 중심으로 협력사를 매년 교체하는 동안, 글로벌 기업은 관계 안정성을 기반으로 공동 투자를 설계한다. 협력사가 개선에 투자할 동기는 거래 지속성이 보장될 때만 생긴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착한 기업이어서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공급망 리스크를 낮추고 비용을 절감하는 합리적 선택이다. 세계 최대 유통기업 월마트의 사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월마트는 2000년대 후반 농업 공급망이 가치사슬 배출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파악했다.
수많은 농가가 분산돼 있고, 각자의 경작 방식도 다른 상황에서 감사나 체크리스트로는 개선이 불가능하다. 전 세계 수만 개 농가로부터 농산물을 공급받는 구조에서, 각 농가의 물 사용량, 비료 사용량, 토양 관리 방식을 일일이 감시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었는데, 농업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이 전체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월마트가 선택한 방법은 WWF(세계자연기금)과 전략적 파트너십이었다. 환경단체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농가가 실제 따를 수 있는 기준을 함께 설계하고 교육 체계와 데이터 수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유통기업은 시장 수요와 구매 기준을 제시했고, 환경단체는 생태학적 타당성을 검증하며 현장 적용 가능성을 높였다.
농가는 요구사항만 받은 게 아니라 구체적인 교육과 기술 지원, 데이터 관리 도구를 제공받았다. 어떤 방식으로 물을 절약하고, 어떻게 토양을 관리하며, 어떤 데이터를 기록해야 하는지 구체적 가이드를 받은 것이다. 협력사가 실제 실행 가능한 수준까지 지원 체계가 설계됐다는 점에서, 일방적 요구가 아닌 공동 역량 구축 모델로 작동했다.
월마트와 WWF의 파트너십이 주목받는 건 환경단체와 손잡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유통기업과 환경단체라는 전혀 다른 두 조직이 각자 역량을 명확히 나눠 시너지를 만들었다는 점이 핵심이다. 월마트는 구매력과 시장 접근성을 제공했고, WWF는 환경 전문성과 농가 교육 역량을 제공했다.
이런 역할 분담 구조 없이 월마트가 혼자서 농가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면 신뢰성이 떨어졌을테고, WWF가 혼자서 시장 변화를 이끌려 했다면 실효성이 없겠다.
파트너십 본질은 각자가 할 수 없는 일을 서로 보완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다. 월마트 사례는 바로 그 구조를 실증한다.
환경 성과만이 아니라 비즈니스 성과로도 나타났다. 물 사용량과 화학비료 사용이 줄면서 농가의 생산 비용이 절감됐고, 월마트는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했다. 환경 데이터가 축적되면서 리스크 예측 가능성이 높아졌고, 브랜드 신뢰도도 강화됐다.
파트너십이 곧 비즈니스 모델의 일부가 된 구조다. 월마트는 협력사에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않았고, 함께 설계하고 함께 투자했다. 그 과정에서 환경단체라는 제3의 파트너를 끌어들여 신뢰성과 전문성을 확보했다.
반면 국내 기업 대부분은 여전히 협력사에 체크리스트를 보내고, 미흡한 부분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협력사는 추가 비용 부담만 느끼고, 기업은 실질적 개선 없이 보고서만 채운다. 파트너십이 아니라 일방적 요구와 감시의 관계가 지속되는 셈이다.
협력사의 자발적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고, 표면적 컴플라이언스만 충족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월마트처럼 접근하려면 협력사를 단기 거래 대상이 아닌 장기 협력 파트너로 재정의해야 한다. 투자할 명분도, 지속성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가치사슬 데이터를 요구하는 건 현실성이 없다.
거래 관계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협력사의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정부가 공공기관 가이드라인에서 가치사슬 관리를 요구하는 지금, 민간기업에 필요한 건 새로운 기준 마련이 아니라 관계 구조의 근본적 전환이다. 파트너십 없이는 공급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겠다.
|심준규.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더솔루션컴퍼니비 심준규 대표


댓글